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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들은 70년 넘게 싸우는가 — 이란·미국·이스라엘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영구원(09One) 2026. 7. 27. 01:00

왜 이들은 70년 넘게 싸우는가 — 이란·미국·이스라엘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가며

2024년 4월, 이란이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했을 때, 세계는 '중동 전면전'이라는 말을 검색창에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분쟁이 아닙니다. 이 갈등의 뿌리는 무려 70년이 넘게 내려오고 있으며, 그 안에는 식민주의의 유산, 냉전의 그림자, 석유의 저주, 혁명의 격정, 그리고 핵이라는 파멸의 카드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이란·미국·이스라엘이 적이 되었는지, 그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각 시기마다 어떤 결정적 사건이 갈등을 고착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장. 씨앗: 식민주의와 국가 형성의 모순 (19세기 말 ~ 1948)

 

1-1.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겠다는 약속, 두 개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 갈등의 첫 번째 씨앗은 1917년 벨푸어 선언에 있습니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유가 유대 민족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낸 시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시기 영국이 아랍 측에게는 아랍 독립 국가를 약속했다는 점입니다(맥마흔-후세인 서한, 1915~1916). 하나의 땅에 두 개의 약속이 존재한 것입니다.

약속 시기 상대방 내용 모순
맥마흔-후세인 서한 1915~1916 아랍 반군(후세인) 오스만 제국 타도 시 아랍 독립국 인정 영역 범위가 불명확
시크스-피코 협정 1916 프랑스·러시아 중동을 영불 양국이 분할 아랍 독립 약속과 정면 충돌
벨푸어 선언 1917 시온주의 운동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적 고향 건설 지지 아랍 주민 권리와 충돌

이 세 약속은 같은 시기에 동시에 존재했으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 이후 100년 분쟁의 원형이 됩니다.

 

1-2. 이란은 어떻게 이 땅에서 '관전자'가 되었나

같은 시기 이란(당시 페르시아)은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주권이 반쯤 침식당한 상태였습니다. 1907년 영러 협정으로 이란은 남북으로 분할되어 각국의 영향권에 놓였고, 1908년에는 남부 유전 지대가 영국의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1901년에는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르시가 이란 전체 석유 탐사권을 60년간 획득했으며, 이것이 훗날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 그리고 BP(브리티시 페트롤리움)의 모체가 됩니다.

이 시기 이란의 경험은 이후 '외세의 간섭'에 대한 깊은 불신의 토대가 되었고, 1979년 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2장. 1953년 쿠데타 — 모든 것의 분기점

 

2-1. 모사데크와 석유 국유화

1951년, 이란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수상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했습니다. 이는 이란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의 석유 수익 배분 구조는 극도로 불공평했습니다:

항목 AIOC(영국) 이란 정부
수익 배분 비율 (국유화 이전) 약 85% 약 15%
국유화 이후 0% 100%

 

2-2. CIA-MI6의 작전 아약스(Operation Ajax)

영국은 국유화에 격분하며 경제 제재와 해상 봉쇄로 대응했고, 나아가 미국 CIA와 공동으로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1953년 8월 19일, 코드명 작전 아약스(Operation Ajax)가 실행되어 모사데크 정부가 전복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CIA가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외국 정부를 전복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으며, 훗난 CIA 자체 보고서에서 그 역할이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미국 국무부의 프레아 프로젝트(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 시리즈에서 해당 작전의 문서가 공개되어 있으며, CIA가 이란 군 장교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언론을 조작한 정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1953년 이후의 결과

쿠데타 이후 복권된 샤 팔레비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란을 서방의 전략적 동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동반한 권위주의적 독재였고, 이는 이란 사회에 깊은 분노를 축적시켰습니다.

[타임라인] 1953 쿠데타의 여파

1953 ──── 쿠데타로 모사데크 축출
   │
1957 ──── CIA가 SAVAK 창설에 기술 지원
   │
1963 ──── 백색혁명(샤의 근대화 개혁) 추진
   │        └─ 호메이니, 개혁 반대 연설 후 체포·추방
   │
1967 ──── 이스라엘-이란 밀월 관계 절정 (무기 거래, 정보 협력)
   │
1979 ──── 이란 이슬람 혁명

 

 

3장. 이스라엘의 탄생과 이란의 미묘한 입장 (1948~1979)

 

3-1.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 세계의 반응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다음 날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 5개국이 동시에 침공했습니다.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입니다.

중동전쟁 연도 결과 이란의 입장
제1차 1948~49 이스라엘 승리, 영토 확장 이스라엘 비공식 승인
제2차 (수에즈 위기) 1956 이스라엘 시나이 점령 후 철수 중립 유지
제3차 (6일 전쟁) 1967 이스라엘 대승, 골란·시나이·서안·가자 점령 외교 단절은 안 함
욤 키푸르 전쟁 1973 이집트·시리아 기습, 이스라엘 반격 샤, 이스라엘에 비밀 유류 공급

 

3-2. 팔레비 시절의 이란-이스라엘 '비밀 동맹'

샤 치하의 이란은 공식적으로 아랍이 아닌 국가였기 때문에, 아랍-이스라엘 갈등에서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란과 이스라엘은 "주변부 전략"(Periphery Doctrine) 하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주변부 전략이란, 아랍 세계의 중심부(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 둘러싸인 비아랍 국가들(이란, 터키, 에티오피아)이 연대하여 아랍 민족주의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전략입니다.

이 시기 이란-이스라엘 관계의 구체적 면모:

분야 내용
무기 거래 이스라엘, 이란에 무기 수출 (미국이 직접 팔기 어려운 시기)
석유 공급 이란, 이스라엘에 비밀리 원유 공급 (태베트 파이프라인)
정보 협력 사바크(SAVAK)와 모사드(Mossad) 간 인적 교류
농업 협력 이스라엘 기술진, 이란 농업 현대화 참여

이 시기의 밀월 관계는 1979년 혁명 이후 180도 전환되며, 그 반전의 충격이 갈등의 강도를 더욱 키웁니다.


 

 

4장. 1979년 이란 혁명 — 지각변동의 해

 

4-1. 혁명의 전개

1979년 1월, 샤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고, 2월 1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망명 15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그해 4월 1일, 이란은 공식적으로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혁명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반미(反美) + 반이스라엘(反以色列) + 이슬람주의의 삼중 결합이었습니다.

 

4-2. 대사관 인질 사건: 미국과의 관계 결정타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급진 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외교관을 444일간 억류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이란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결정적 사건입니다:

'

항목 인질 사건 이전 인질 사건 이후
미국-이란 외교 관계 전략적 동맹국 단절 (至今 미복원)
미국 내 이란 자산 정상 운영 동결 (약 120억 달러)
미국인의 이란 인식 중동의 현대화 모델 '악의 축' 이미지 시작
이란의 대미 인식 샤를 지원한 간섭국 '대사탄'(Great Satan)

이 사건 이후 양국은至今(2025년 기준) 공식 외교 관계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으며, 스위스가 이란의 '보호국 역할'(Protecting Power)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제법상 비엔나 외교 관계 협약 제45조에 근거한 보호국 제도의 적용 사례입니다.

 

4-3. 이스라엘을 '소사탄'으로 선언하다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사탄'(Great Satan), 이스라엘을 '소사탄'(Little Satan)으로 명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그 자리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사무실이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부터 이란의 공식 정책은 "시온주의 정권의 소멸"이 되었으며, 이는至今 이란 헌법 전문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5장.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스라엘의 선택 (1980~1988)

 

5-1. 사담 후세인의 침공

1980년 9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혵명으로 혼란에 빠진 이란을 기습 침공했습니다. 이 전쟁은 8년간 계속되어 약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엇갈린 선택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 공식 입장 실제 행동
미국 공식 중립 선언 사우디·쿠웨이트를 통해 이라크에 정보·무기 지원
이스라엘 이란의 적 이란에 무기 판매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과 연계)

 

5-2. 이란-콘트라 스캔들 (1985~1987)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이라크를 지원하면서도, 비밀리에 이란에 미사일을 판매하여 레바논에서 억류 중인 미국인 인질 석출을 교섭했습니다. 판매 대금의 일부는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자금으로 유용되었습니다.

이 스캔들은 레이건 행정부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며, 미국의 대중동 정책이 얼마나 이중적(internal contradiction)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 스캔들은 미국 의회에서 대규모 청문회를 거쳤고, 관련 문서는 미 국립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워 위원회(Tower Commission) 보고서가 대표적인 공식 문건입니다.


 

 

6장. 냉전 종식 이후: 새로운 적대의 구조화 (1990~2001)

 

6-1. 걸프전과 이란의 고립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걸프전(1991)이 벌어졌을 때,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미국의 중동 주둔이 상시화되면서, 이란은 자신을 포위하는 미국의 군사 기지 네트워크를 목도하게 됩니다.

국가 미군 주요 시설 이란과의 거리
카타르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 (CENTCOM 본부) 약 250km
바레인 제5함대 본부 약 300km
쿠웨이트 캠프 아리잔 약 400km
아랍에미리트 알 다프라 공군기지 약 300km
오만 무스나트 공군기지 약 500km

이 기지 배치는 이란의 안보 담론에서 '포위 전략'(siege mentality)을 심화시켰고, 이후 이란이 프록시(proxy)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동기 중 하나가 됩니다.

 

6-2. 이란의 핵 프로그램: '죄수의 딜레마'

핵 문제는 이란-미국-이스라엘 삼각관계의 가장 위험한 축입니다.

핵 비확산 조약(NPT)은 1968년 체결되어 1970년 발효되었으며, 이란은 1970년에 가입했습니다. NPT 제4조는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보장하지만, 제2조는 핵무기 보유를 금지합니다.

이란의 핵 활동 타임라인:

1979 ──── 혁명 이후 핵 프로그램 축소
   │
1980s ─── 이란-이라크 전쟁 중 비밀리 재개 (파키스탄 압둘 칸 박사 기술 이전)
   │
2002 ──── 이란 반체제 단체, 나탄즈·아라크 시설 폭로
   │        └─ IAEA 사찰 시작
   │
2003 ──── 이란, NPT 추가의정서 잠정 적용 합의
   │
2006 ──── UN 안보리, 이란 제재 결의안 1696호 채택
   │
2010 ──── Stuxnet 바이러스로 나탄즈 원심분리기 파괴 (미국-이스라엘 공동 작전으로 추정)
   │
2015 ──── JCPOA 합의
   │
2018 ──── 미국 일방 탈퇴
   │
2020s ─── 우라늄 농축 60% 돌파 (무기급 90%에 근접)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이란의 핵 활동을 NPT와 이란-IAEA 안전조치 협정(INFCIRC/214)에 근거하여 사찰하고 있으며, 정기 이사회 보고서를 통해 이란의 농축 현황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7장. 프록시 전쟁: 직접 충돌 대신 대리인을 통해 (2000s~현재)

 

7-1. 이란의 '저항 축'(Axis of Resistance)

이란은 직접 미국이나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대신, 중동 각지의 시아파 및 반미·반이스라엘 무장 조직을 지원하는 전략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록시 조직 활동 지역 이란과의 관계 주요 무력 활동
헤즈볼라 레바논 IRGC의 정예 쿠드스군이 직접 훈련·자금 지원 2006년 레바논 전쟁, 이스라엘 북부 로켓 공격
하마스 가자 지구 자금·무기 지원 (수니파이나 이해관계 일치) 2023년 10월 7일 공격
후티 (안사르 알라) 예멘 미사일·드론 기술 이전 홍해 상선 공격, 사우디 공격
시아파 민병대 이라크 IRGC 산하 조직 미군 기지 피격
시리아 아사드 정권 시리아 군사 고문·자금 직접 지원 내전 개입

 

7-2. 이스라엘의 대응: '전장 관리'(Campaign Between the Wars)

이스라엘은 이란의 프록시 네트워크에 대해 '중간 전쟁 작전'(Mabam)이라 불리는 저강도 선제타격 전략을 실행해 왔습니다. 시리아 내 이란 기지, 무기 이송 호송대, 헤즈볼라 무기 시설 등을 수백 차례 공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군(IDF)의 공식 입장은 "이란의 군사적 존재를 시리아에 뿌리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 전략은 이스라엘 안보 담론에서 'אד마 노그아'(Red Line) 관리의 일환으로 이해됩니다.


 

 

8장. '대사탄'과 '소사탄'의 공통점: 왜 이란을 위협으로 보는가

미국과 이스라엘은 종종 '특별 관계'(Special Relationship)로 묶이지만, 이란에 대한 위협 인식의 초점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분 미국의 관점 이스라엘의 관점
핵 위협 비확산 체제 위반, 중동 핵 도미노 우려 생존의 문제, '제2의 홀로코스트' 언급
테러 지원 해외 미군·미국인 안전 국경 내 직접적 살상 위협
에너지 안보 호르무즈 해협 자유 항행 직접적 관련 상대적 낮음
지역 패권 중동 질서 주도권 유지 지역 내 적대국의 세력 확장 차단
국내 정치 유대 로비·석유 산업의 영향 생존 담론이 선거의 핵심 의제

 

 

9장. 이란 측 서사: "왜 우리가 분노하는가"

공정한 이해를 위해 이란의 관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란의 반미·반이스라엘 감정에는 다음과 같은 축적이 있습니다:

시간순 분노의 축적:

시기 사건 이란 사회에 남긴 상처
1953 CIA 쿠데타 민주주의의 좌절, 외세 불신의 원형
1953~1979 샤 독재 지원 미국이 독재자를 후원했다는 인식
1980~88 이라크 전쟁 시 서방의 이라크 편향 서방이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묵인
1988 이란항공 655편 격추 미 해군 순양함이 민간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 290명 전원 사망
1990s~ 포괄적 제재 민간 경제 피해, 의약품 부족 등 인도적 영향
2020 솔레이마니 암살 가장 존경받는 군 사령관을 공습으로 제거

특히 1988년 이란항공 655편 격추 사건은 이란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으며, 미국이 공식 사과하지 않은 점이 지속적인 불신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건의 국제법적 쟁점은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조사 보고서와 이란이 제소한 ICJ(국제사법재판소) 사건(1989년 합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장. 정리: 70년 갈등의 구조를 한눈에 보기

아래 도표는 이란-미국-이스라엘 관계의 역사를 핵심 전환점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
  시간          사건              관계 변화 방향
━━━━━━━━━━━━━━━━━━━━━━━━━━━━━━━━━━━━━━━━━━━━━━━━━━━━━━━
  1917     벨푸어 선언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
    │
  1948     이스라엘 건국         이란: 중립~미인정
    │
  1953     CIA 쿠데타           미국↔이란: 동맹(통제적)
    │                           이란↔이스라엘: 밀월
    │
  1967     6일 전쟁            이스라엘 팽창 → 아랍 세계 격분
    │
  1979     이란 혁명            미국↔이란: 적대 전환
    │                           이란↔이스라엘: 적대 전환
    │
  1980~88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 이라크 지원 / 이스라엘: 이란에 무기 판매
    │
  1991     걸프전              미군 중동 상시 주둔 → 이란 포위감 심화
    │
  2002     이란 핵 폭로         핵 갈등 본격화
    │
  2015     JCPOA               잠정적 타협
    │
  2018     미국 JCPOA 탈퇴      최대 압박 → 이란 핵 고도화
    │
  2023~    가자 전쟁 확전       이란-이스라엘 직접 군사 충돌 가능성 최고조
━━━━━━━━━━━━━━━━━━━━━━━━━━━━━━━━━━━━━━━━━━━━━━━━━━━━━━━

 

 

마치며

70년의 갈등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한 번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해결할 수 없는 현재를 만들었다."

1953년의 쿠데타, 1979년의 혁명, 1948년의 건국 — 이 세 사건은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발생했지만, 그 파장이 겹겹이 쌓여 오늘날의 위기를 형성했습니다.

이 갈등을 이해하려면 어느 한쪽의 서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1948년은 건국의 기적이며, 팔레스타인에게는 '나크바'(대재앙)입니다. 미국에게 1953년은 냉전 전략의 성과였으며, 이란에게는 민주주의 약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서사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그 전쟁의 기억이 다시 다음 세대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 — 이것이 이 갈등이 끝나지 않는 진짜 이유입니다.


 

 

참고 출처

아래는 본문 작성에 참고한 주요 출처입니다:

  1. 미국 국무부 FRUS 시리즈 (Iran, 1951-1954):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1-54Iran
  2. CIA 공식 보고서 – 1953 이란 쿠데타: https://www.cia.gov/readingroom/collection/cia-and-iran
  3. IAEA 이란 안전조치 보고서 (정기 발행): https://www.iaea.org/newscenter/focus/iran
  4. 유엔 안보리 이란 관련 결의안 목록: https://www.un.org/securitycouncil/content/iran
  5. 벨푸어 선언 원문 (영국 국립기록보관소): https://www.nationalarchives.gov.uk/education/resources/balfour-declaration/
  6. ICJ – Oil Platforms case (Iran v. United States, 2003): https://www.icj-cij.org/case/90
  7. 타워 위원회 보고서 (이란-콘트라): https://www.reaganlibrary.gov/archives/topic-guide/iran-contra-affair
  8. NPT 전문 (IAEA): https://www.iaea.org/topics/nuclear-non-proliferation-treaty
  9.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 Iran's Nuclear Program: https://www.cfr.org/backgrounder/irans-nuclear-program
  10. SIPRI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중동 군비 데이터: https://www.sipri.org/databases
  11. Suzanne Maloney, Iran's Long Reach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https://www.cfr.org/book/irans-long-reach
  12. Ervand Abrahamian, The Coup: 1953, the CIA, and the Roots of Modern U.S.-Iranian Relations (The New Press, 2013)

 

 

해시태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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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본문에 사용된 역사적 사실은 2025년 5월까지의 공개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25년 5월 이후의 최신 상황은 반드시 별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통계·수치는 출처별로 집계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